공민왕은 고려의 제 31대 왕입니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 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다재자능하였다 평가됩니다. 특히 서예와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공민왕이 그린 그림들의 작품성은 당대에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특히 실물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작품으로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와,《달마절로도강도》,《이양도(二羊圖)》, 《노국대장공주진(眞)》,《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염제신 상》, 《손홍량 상(孫洪亮象)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습니다.
공민왕의 서예 작품으로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을 당시 직접 써 주었다 전해지는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안동 영호루 현판,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 등이 있습니다.
공민왕은 사실 원나라의 황실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원나라의 압박에 못이겨 몽골에 들어가게 됩니다. 1341년 충혜왕 시절 원나라로 건너가게 된공민왕은 곧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원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즉위 초반부터 원나라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고자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친원파인 권문세족과 외척들, 부패한 관료들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조정으로 이끌고 오는 등 여러가지 개혁들을 시행하였습니다. 공민왕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 또한 그의 개혁안을 지지하며 많은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공민왕은 당시 대륙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원과 명의 교체기에 들어 섰던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들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공민왕은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였으며 정동행성 이문소 또한 철폐하였습니다. 또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였고, 기황후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은 노국대장공주의 사망 이후 개혁의 의지가 꺾여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나라의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그저 매일 왕비의 초상화만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전해집니다. 공민왕은 자신의 든든한 개혁 파트너를 잃은 뒤 결국 술과 남색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공민왕은 승려인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였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은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게 된 토지들을 원래 땅 주인들에게 반환하게 한 기구입니다. 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주며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략과 상습적인 왜구의 침입을 받으며 그의 개혁은 또다시 중단되고 맙니다.
홍건적의 1차 침입은 1359년 홍건적의 장수인 모거경이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 고려 국경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방실과 최영, 안우가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1361년 다시 한 번 한반도의 고려를 침략합니다. 20만명의 홍건적은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곧 고려 군대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을 넘어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려가 홍건적과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며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과의 관계를 계선하기 위해 관제를 한 때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공민왕은 사실상 모든 개혁 의지를 잃고 남색과 술에만 빠져 지내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아름답고 젊은 남자들을 뽑아 자제위를 설치하여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자제위에 속해있던 홍륜(洪倫)이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益妃)와 간통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내시 최만생이 왕에게 이 사실을 은밀하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이겠다며 분노하였습니다. 이에 최만생은 자신 또한 제거될 수 있겠다는 공포를 얻어 홍륜에게 그와 익비의 관계를 왕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홍륜은 그 날 밤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시해하게 됩니다.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한 공민왕을 시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자들은 곧 체포되어 사지를 찢는 거열형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삼족 또한 멸족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공민왕이 살해당한 자제위 사건 이후 어린 우왕이 이인임에 의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는 당시 궁녀였던 한씨의 소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왕은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의 소생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왕은 사실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들은 이 소문을 사실이라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핏줄이 아님에도 고려의 왕으로 즉위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겼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 주장을 이용하여 새로운 왕조로 조선을 개국한 것을 정당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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