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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 역사] 고려 제7대 국왕 목종: 비운의 군주와 격동의 고려 전기

by 이해 2026. 2. 22.

고려 시대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군주를 꼽으라면 단연 제7대 국왕인 목종을 들 수 있습니다. 이름은 왕송이며, 고려의 기틀을 다지던 초기 국왕들 사이에서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신하에게 폐위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불운한 인물입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듯, 목종의 치세는 그의 어머니인 천추태후(헌애왕후)와 권신 김치양의 전횡, 그리고 후대의 왕인 현종을 옹립한 강조의 변 등 굵직한 사건들에 가려져 국왕 본인의 치적이나 내면의 고뇌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종의 재위 기간(997년 ~ 1009년)은 고려 사회의 근간이 되는 토지 제도가 정비되고, 거란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국가의 체제를 수호해야 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 전기의 뼈아픈 과도기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국왕 목종의 탄생과 즉위, 그의 치적과 정치적 한계,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잡한 왕실 혼인과 권력 구도 속에서 태어난 왕자

목종이 태어난 고려 초기는 태조 왕건이 호족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추진했던 정략결혼의 여파로 왕실 내부의 족내혼(근친혼)이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목종의 아버지는 제5대 국왕인 경종이며, 어머니는 태조의 아들인 대종 왕욱의 딸 헌애왕후(훗날의 천추태후)입니다. 경종이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을 때, 목종(왕송)의 나이는 불과 두 살이었습니다. 핏덩이에 불과했던 왕송이 곧바로 왕위를 잇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왕위는 그의 외삼촌이자 헌애왕후의 오빠인 성종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성종은 유교 정치를 도입하며 고려의 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명군이었으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성종은 조카인 왕송을 궁궐로 불러들여 마치 친아들처럼 아끼고 보살피며 제왕으로서의 교육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개령군으로 봉해져 성종의 비호 아래 성장한 왕송은 성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마침내 18세의 나이로 고려 제7대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숙부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한 듯 보였지만, 그의 즉위와 함께 왕실의 권력 구도는 급격한 지각변동을 맞이하게 됩니다.


수렴청정과 천추태후의 절대 권력

목종이 즉위할 당시 18세라는 나이는 스스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千秋太后)라 칭하며 섭정(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려 시대에 태후가 섭정을 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추태후가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되면서, 고려의 조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천추태후는 성종 시절에 확립되었던 유교적 정치 이념을 일부 후퇴시키고, 자신이 선호하는 불교와 전통적인 토속 신앙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천추태후의 총애를 받던 김치양이라는 인물의 등장이었습니다. 김치양은 원래 승려 출신으로 천추태후와 내연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성종 시절에는 발각되어 장형을 맞고 유배를 당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고 천추태후가 권력을 잡자, 김치양은 유배에서 풀려나 단숨에 조정의 핵심 실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김치양은 태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인사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했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저택을 화려하게 꾸미는 등 극심한 부정부패와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젊은 국왕 목종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태도와 김치양의 권력 남용 속에서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잃어가며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실권 없는 왕의 고군분투: 개정전시과의 시행과 체제 정비

목종의 치세가 오직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부정부패로만 점철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권력의 핵심에서는 밀려나 있었지만, 목종은 고려의 국가 기틀을 다지기 위해 나름대로 중대한 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998년(목종 원년)에 단행된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의 시행입니다.
전시과는 고려 시대 국가가 관료들에게 직역의 대가로 수조권(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을 나누어주는 핵심적인 토지 제도입니다. 앞서 5대 경종 때 처음 제정된 시정전시과는 관직의 높낮이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고려하여 토지를 지급했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지고 관료들 사이의 불만이 컸습니다. 이에 목종은 기존 제도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인품이라는 주관적인 기준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관직의 등급(18과)만을 기준으로 토지와 땔감을 지급하는 개정전시과를 반포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관료 제도가 그만큼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형태로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며,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목종은 성종 대에 일어났던 제1차 거란 침입 이후 불안정했던 국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서북면 일대의 군사 시설을 정비하고, 거란(요나라)과 송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학문을 장려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목종이 단순히 유약한 허수아비 국왕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제도를 정비하고자 했던 군주였음을 시사합니다.


남색 스캔들과 정치적 도피, 그리고 후계자 갈등의 점화

그러나 치세 중반을 넘어서며 목종은 정치에 대한 의지를 급격히 상실하게 됩니다. 섭정인 천추태후의 간섭은 여전했고, 김치양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비대해졌습니다. 정치적 스트레스와 무력감에 시달리던 목종은 결국 치명적인 일탈에 빠져들고 맙니다. 바로 유행간과 유충정 등 미소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동성애(남색)에 빠진 것입니다. 특히 유행간에 대한 목종의 총애는 도를 넘어섰는데, 유행간은 왕의 총애를 믿고 기고만장하여 대신들을 능멸하고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천추태후-김치양 파벌과 유행간 파벌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 왕실을 뒤흔들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바로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목종에게는 병이 있어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 틈을 타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사생아가 태어났고, 김치양은 자신의 핏줄인 이 아이를 고려의 다음 국왕으로 세우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몄습니다. 왕씨의 나라 고려가 김씨의 나라로 넘어갈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비록 정치에 뜻을 잃고 방황하던 목종이었지만, 왕조의 정통성을 지켜야 한다는 마지막 자존심과 책임감마저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종은 김치양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태조 왕건의 유일한 적통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훗날의 현종)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왕순은 천추태후의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태조의 아들 안종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정적이었습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켜 절(신혈사)에 가두고 자객을 보내 수차례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이때마다 목종은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보호하며, 고려 왕실의 적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강조의 변: 구원군에서 반역자로 돌변한 무장

1009년 정월, 궁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정전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목종은 병상에 눕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김치양 일파는 대량원군을 제거하고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다고 판단한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로 있던 맹장 강조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김치양 일파를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호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강조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뜻밖의 방향으로 굴러갔습니다. 개경으로 향하던 강조에게 국왕이 이미 승하했고, 김치양 일파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진 것입니다. 이에 강조는 발길을 돌리려 했으나, 국왕이 살아있든 죽었든 이번 기회에 썩어빠진 조정을 엎어버려야 한다는 부하들의 간언을 듣고 계획을 수정합니다. 강조는 자신이 주도하여 대량원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역적들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개경으로 진격했습니다.
개경에 당도하여 진상을 파악한 강조는 목종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군대를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태였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상, 기존의 왕을 섬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강조는 궁궐을 장악하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처형한 뒤, 천추태후를 유배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불렀던 국왕 목종마저 폐위시켜 버립니다. 고려 역사상 최초로 무신에 의해 국왕이 폐위되는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강조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비극적인 죽음과 역사적 평가

폐위된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와 함께 유배지인 충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배지로 향하는 길, 목종은 자신이 타던 말의 고삐를 직접 잡고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의 회한에 잠겼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강조는 폐위된 국왕이 살아있는 한 자신의 권력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 적성현(현재의 파주 일대) 부근에서 강조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목종은 시해당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 재위 12년 만에 맞이한 비참하고도 허망한 최후였습니다.

고려사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sngl=N&ccbaAsno=0001040000000&ccbaCpno=2112101040000)

역사 기록인 《고려사》는 목종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천성이 총명하고 과단성이 있어 초반에는 정사를 잘 돌보았다고 평가하지만, 후반기에는 남색에 빠져 소인배들을 가까이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결국 화를 자초한 암군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목종을 단순히 무능한 군주로만 치부하지 않습니다.

목종은 막강한 외척 세력(천추태후)과 권신(김치양)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어 실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구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전시과를 반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마지막 순간에는 목숨을 걸고 김치양의 야욕을 막아내어 왕씨 왕조의 정통성을 현종에게 무사히 넘겨준 수호자로서의 역할도 해냈습니다. 그가 지켜낸 대량원군(현종)이 훗날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여는 위대한 성군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목종의 희생과 결단은 고려 역사에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닙니다.

결론적으로 목종은 고려라는 젊은 국가가 왕권과 신권, 그리고 외척 세력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거치며 체제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희생된 비운의 과도기적 군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실패한 왕의 궤적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실패 속에서 고려가 더 큰 도약을 이뤄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