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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 역사] 세도정치의 절정과 삼정의 문란 시대,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

by 이해 2026. 3. 23.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기가 바로 세도정치기이며, 이 세도정치의 정점과 모순이 폭발하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 제25대 국왕 철종입니다. 본명은 이원범, 초명은 이쾌나이며 1831년에 태어나 1864년에 승하하기까지 조선 왕조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를 군주로서 겪어냈습니다. 철종의 생애는 개인의 비극적인 가족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외척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구조적 한계, 그리고 마침내 농민들의 분노가 전국적인 항쟁으로 터져 나온 임술농민봉기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습니다. 정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가계도, 왕위 계승 과정, 치세 기간의 정치적 상황 및 사회적 혼란, 그리고 그의 최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자 합니다.



비극적인 가계도와 강화도에서의 유배 생활

철종의 가계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로부터 이어집니다.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이 철종의 할아버지이며,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이광이 철종의 아버지입니다. 즉, 철종은 영조의 고손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 가계는 조선 후기 정치적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안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은언군은 정조 즉위 초반 홍국영과 관련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은언군의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천주교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사사되었고, 이 사건의 여파로 은언군 역시 사약을 받고 사망합니다.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 이광 일가의 삶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순조 연간에 잠시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1844년 헌종 10년에 일어난 민진용의 옥사에 철종의 이복형인 이원경이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철종의 일가는 다시 강화도로 쫓겨나 평민과 다를 바 없는 극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원범의 나이는 불과 14세였습니다.
강화도에서의 이원범은 왕족의 신분을 박탈당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땔감을 구하고 밭을 가는 등 일반 농민과 동일한 삶을 살았으며, 이로 인해 훗날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유배 생활 중 학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명시하여 덧붙이자면, 민간의 구전이나 일부 야사집에서는 이 시기 이원범이 강화도의 평민 처녀 양순이와 풋풋한 첫사랑을 나누었다는 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양순이와의 혼인을 약속했으나 갑작스러운 왕위 계승으로 인해 한양으로 떠나게 되었고, 이후 양순이가 궁궐 법도에 가로막혀 철종을 만나지 못한 채 상사병으로 죽었거나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는 정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며, 훗날 소설과 극작품 등을 통해 극화된 야사일 뿐입니다. 정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혼인을 약속했거나 교류했던 특정한 평민 여성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헌종의 승하와 갑작스러운 왕위 계승

1849년, 조선 제24대 국왕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합니다. 조선 왕실은 심각한 후계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은 순조의 비이자 안동 김씨 가문 출신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였습니다. 헌종에게는 가까운 왕족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자의 지명은 전적으로 순원왕후의 권한이었습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정치를 유지하고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고, 그 결과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고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여 통제하기 쉬운 강화도의 이원범이 낙점되었습니다.
순원왕후는 이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하는 교지를 내립니다. 영의정 정원용을 비롯한 봉영 사절단이 강화도로 파견되어 이원범을 한양으로 모셔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야사에 기록된 일화가 존재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이원범 일가는 웅장한 규모의 봉영 행렬이 자신들의 초가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약 행렬인 줄 알고 극도의 공포에 질려 산으로 도망치거나 숨으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당시 유배된 왕족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았음을 보여주는 민간의 전승입니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봉영 대신 정원용이 강화도에 도착하여 이원범을 배알하고 교지를 전했을 때, 이원범은 당황하긴 했으나 예를 갖추어 명을 받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원범은 1849년 6월, 19세의 나이로 덕수궁 이궁을 거쳐 창덕궁 희정당에서 조선 제25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철종입니다. 농사꾼으로 살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일국의 군주가 된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과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철종은 즉위 당시 19세로 성인이었으나, 제왕으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궁중 법도와 국정에 무지했기 때문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철종은 즉위 직후부터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등 제왕에게 필요한 기초적인 학문을 뒤늦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세간에는 철종이 일자무식이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일부 야사에도 반영되어 있으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 시절에도 천자문 등의 기초적인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즉위 후 경연에 참여하여 학문에 매진하려 한 기록이 다수 남아있습니다. 다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다른 왕들에 비해 학문적 성취가 늦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851년 철종 2년,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 가문인 안동 김씨 가문의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간택합니다. 그녀가 바로 철인왕후입니다. 이로써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영은부원군에 봉해졌고,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절정에 달합니다.
세도정치란 왕실의 외척 등 소수의 특정 가문이 국가의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정치 형태를 말합니다. 김문근을 비롯하여 김좌근 등 안동 김씨 일문은 비변사를 비롯한 육조의 요직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과거 제도는 뇌물과 청탁으로 얼룩졌고,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관직을 돈으로 산 수령들은 자신이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이 시기 철종은 왕으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안동 김씨 세력의 결정에 도장을 찍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철종 친정 이후에도 이러한 권력 구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삼정의 문란과 백성들의 고통

세도정치기의 극심한 부패는 삼정의 문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삼정은 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3대 근간인 전정, 군정, 환곡을 의미합니다. 철종 치세에 이 삼정은 관리들의 부정부패 수단으로 전락하여 백성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첫째, 전정은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입니다. 관리들은 세금을 내야 할 토지 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은결을 숨겨두고 중간에서 착복하거나, 황무지를 옥토로 둔갑시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또한, 정해진 세율 외에 온갖 명목의 부가세를 덧붙여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였습니다. 도지, 가작 등의 명목으로 수령과 아전들이 중간에서 떼어먹는 양이 정작 국가에 납부되는 양보다 많았습니다.
둘째, 군정은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바치는 베나 무명 즉, 군포를 징수하는 제도입니다. 군정의 문란은 삼정 중에서도 가장 극심했습니다. 백골징포라 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군포를 거두었고, 황구첨정이라 하여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려 군포를 징수했습니다.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가면, 이웃에게 군포를 전가하는 인징과 친척에게 전가하는 족징이 자행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도망간 이웃의 세금까지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마을 전체가 야반도주하는 참상도 벌어졌습니다.
셋째, 환곡은 본래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갚게 하는 빈민 구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철종 대에 이르러 환곡은 강제적인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곡식을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빌려주도록 억지를 부리는 늑대, 빌려줄 때는 모래나 겨를 섞어 양을 부풀리고 받을 때는 온전한 곡식으로 꽉 채워 받는 폐습이 만연했습니다. 심지어 곡식을 아예 빌려주지도 않고 장부상으로만 빌려준 것처럼 꾸며 이자를 거두어들이는 허류라는 수법까지 동원되었습니다. 환곡의 이자는 관아의 운영비나 관리들의 사재로 착복되었습니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화전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전국 각지에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습니다.



임술농민봉기의 발발과 전국적 확산

백성들의 억눌린 분노는 1862년 철종 13년, 마침내 임술농민봉기라는 거대한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그 도화선이 된 곳은 경상도 진주였습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으나, 그만큼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진주 우병사로 부임한 백낙신은 탐욕스러운 인물로, 부임 직후부터 환곡을 조작하여 수만 냥을 백성들에게 강제로 거두어들였습니다. 또한 진주 목사 홍병원 역시 이에 동조하여 수탈을 일삼았습니다.
견디다 못한 진주의 농민들은 몰락 양반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결집했습니다. 1862년 봄,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수만 명의 농민들이 스스로를 초군이라 칭하며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관아를 습격하여 부패한 아전들을 처단하고, 수탈의 상징이었던 조세 대장을 불태웠습니다.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은 두려움에 떨며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도망쳤습니다.
진주에서의 성공적인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삼남 지방 즉,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일대로 퍼져나갔습니다. 익산, 함평, 청주, 회덕 등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멀리 떨어진 함경도와 제주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농민 항쟁이었습니다. 농민들의 요구는 단 하나,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철종과 조정은 전국적인 민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무력 진압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각 지역에 안획사와 선무사를 파견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진주 지역에 안획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진주 민란의 근본 원인이 백성들의 반역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삼정, 특히 환곡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철종의 개혁 시도와 삼정이정청 설치

전국적인 농민 봉기라는 위기 앞에서 철종은 나름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철종은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삼정이정청이라는 임시 특별 기구를 설치할 것을 명했습니다. 삼정이정청은 삼정의 문란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삼정이정청은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선안을 내놓았습니다. 전정과 군정은 폐단을 부분적으로 시정하고 관리를 철저히 하는 선에서 타협안을 찾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환곡에 대해서는 파환부전이라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채택했습니다. 파환부전은 기존의 환곡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대신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인 결작으로 전환하여 거두어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관리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를 없애고, 토지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며,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나 양반들에게 세금 부담을 지우는 합리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기득권 세력인 양반 지주들과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가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온갖 구실을 들어 파환부전의 부당함을 상소했습니다. 결국 철종은 이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이겨낼 만한 정치적 힘이 없었습니다.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개혁안은 백지화되었고, 삼정이정청은 혁파되고 말았습니다. 철종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했던 개혁 시도는 세도정치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은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잦은 후사 영선과 쓸쓸한 최후

정치적인 무력감과 개혁의 좌절은 철종의 개인적인 삶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국왕으로서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답답함 속에서 그는 점차 정사에서 멀어지고 후궁들과의 주색에 빠져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종은 철인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여러 후궁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5남 6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태어난 자녀들 중 대부분이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후궁 숙의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뿐이었습니다. 영혜옹주는 훗날 개화파 지식인 박영효와 혼인하였으나, 그녀 역시 혼인 직후 1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맙니다.
자식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참척의 고통과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압박감은 철종의 건강을 급격히 쇠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철종 치세 후반기로 갈수록 국왕의 병증을 논의하는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잦은 잔병치레와 체력 저하에 시달리던 철종은 1864년 1월, 33세의 젊은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영조-사도세자-은언군으로 이어지던 왕실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다시 한번 왕위 계승의 문제가 발생했고, 이번에는 신정왕후 조씨(익종의 비)와 흥선군 이하응의 정치적 결탁에 의해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명복이 제26대 국왕 고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로써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고,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철종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정사 기록을 종합하여 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부패한 시대의 희생양이자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던 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의 가난한 평민 신분에서 갑작스럽게 국왕이 된 그는 제왕으로서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안동 김씨라는 거대한 외척 세력이 권력을 철저히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은 철저히 무력화되어 있었습니다. 철종이 비록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시도했던 정황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는 삼정의 문란에 분노하는 하교를 내리기도 했고, 관리들의 부패를 척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개혁을 뒷받침할 만한 친위 세력도, 군사력도, 경제적 기반도 없었습니다. 기득권층의 반발 앞에 그의 개혁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고, 이는 국왕 개인의 무능함이라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정치 구조가 가진 한계에서 기인한 바가 큽니다.
철종의 시대는 조선 후기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여 붕괴의 조짐을 보이던 임계점이었습니다. 세도정치의 폐단과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했고, 이는 임술농민봉기라는 민중의 자각과 항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철종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으나, 시대를 이끌어갈 동력을 갖추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한 비운의 국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치세는 조선이 근대로 나아가기 전 겪어야 했던 뼈아픈 진통의 시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